[편집자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를 대리하고 있는 도태우 변호사가 6월 17일 제출한 서면 발췌, 『세기와 더불어는 어떻게 날조되었나』, (이명영 저, 세이지, 2021, 이하 ‘책’이라 약합니다)을 통해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이 과거 일정기(日政期)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살펴봅니다.

 

가. 김정일 백두산 탄생신화 조작

김일성 회고록은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을 계기로 1·2권 이 출간되었고 이후 8권까지 나왔다. 무릇 회고록이라고 하면 한 인물의 일생을 소박하고 진솔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상화와 역사왜곡의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 신화도 역사적 사실의 외피를 쓰고 태연히 서술하 고 있었다. 김일성은 만주지역 항일빨치산 가운데 가장 먼저 소련 경내로 도피했다. (…)  소련으로 들어가기 직전 김일성은 흑룡강(黑龍江)성 동녕(東寧)에서 빨치산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숙과 간단한 야전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김정숙은 이미 수태한 몸이었다. 김일성 일행은 연해주 보로실로프(현재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리노예 병영에 수용되었고, 이듬해인 1941년 2월 16일 김정숙은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에게는 ‘유라’라는 소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김정일이다. 김일성 부부는 이곳에서 1942년 봄까지 머물렀고, 김정일이 태어난 건물은 아직도 현장에 오롯이 남아 있다. (…)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 신화는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난 위인’으로 출생지를 세탁함으로써 세습승계의 콤플렉스를 씻어보려는 눈물겨운 안간힘이었다. (책 11~13쪽)

  왼쪽) 북한이 주장하는 김정일 생가터. 오른쪽) 실제 생가인 러시아 연해주 라즈돌리노예 88번지.
  왼쪽) 북한이 주장하는 김정일 생가터. 오른쪽) 실제 생가인 러시아 연해주 라즈돌리노예 88번지.

 

나. 최덕신의 전향을 부친 최동오에 대한 일화로 포장

그(최동오)의 아들이 육군 장성으로서 외무장관까지 지낸 최덕신(出德新)이다. 미국으로 이민가더니 김일성에게 접근해서 평양 가서 살다가 몇 해 전에 죽었다. 최덕신의 평양으로의 전향이 수수께끼였다. 김일성은 무슨 논리로 崔를 유인했던가. 이에 대한 해답의 일부를 회고록이 보여주고 있다. (…) 정분과 경의에 넘치는 아주 잘 꾸며진 추억담, 그것을 아들 최덕신에게 들려주었을 때 늙고 할 일 없는 그가 평양에 접근하고 싶었을 심정이 알만도 하다. (책 46쪽)

 

다. 독립운동가들과 김일성 부친의 교류 날조

회고록에서는 그 유명한 투사들이 모두 아버지의 친구나 부하로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명한 항일투사 오동진이다. 그는 평안북도 의주 사람으로 金의 아버지보다 5살 위이다.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 무장투쟁으로 일관하다가 1930년에 옥사했는데 철저한 민족주의독립운동가였다. 오동진은 3·1 운동을 고비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는 金의 아버지의 충직한 추종자로 되어 있으며 길림에서 金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던 것으로 꾸며져 있다. (책 46~47쪽)

 

라. 도산 안창호에 대한 날조된 폄하

안창호(安昌浩)가 1927년 2월에 길림에 와서 민족운동의 장래를 놓고 대강연회를 연 일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49세였다. 그때 15세의 김일성이 安의 고루한 민족주의 노선을 반박하는 질의서를 내자 安은 답변이 궁해 어쩔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1968년 「전기」의 기술이다. 회고록에서는 질의서를 받자 安은 강연을 중단하고 말았다고 기술을 바꿔 놓았다. (…) 安의 강연이 중단된 것은 金의 질의서 때문이 아니라 중국경찰이 들어닥쳤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상해(上海)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이 들고 일어나서 결국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런데 회고록에는 김일성이 대중을 동원하여 길림정권에 압력을 넣어서 석방시켰다고 하고 있다. (책 49쪽)

 

마. 손정도 목사 집안 문제 김일성의 허구적 미화와 통일전선 공작 재료로 이용

당시 손 목사는 49세, 金은 18세였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까지 지낸 바 있는 독립운동의 대원로가 아들뻘 밖에 안되는 사람에게 딸의 결혼문제를 의논했다는 것이다. (책 52~53쪽)

 

바. 김구에 대한 왜곡 (책 106쪽)

 

사.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안창호, 이청천, 김구, 이승만, 김좌진, 홍범도 등 다른 애국자들을 거짓말로 폄하 (책 118~120쪽)

 

아. 김일성 김정일 가계 우상화를 위해 백두산 출생설을 날조

조선전사에는 친절하게도 백두산 근거지 주요 지역도란 지도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주요 군사행동도란 지도가 실려있는데 백두산 밀영이 모두 만주 땅 안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1982년에 나온 김일성 동지 전기에서나 김일성 동지 혁명력사에 있어서도 같았다. 1983년에 나온 백과전서에서도 백두산 밀영지는 곰의 골(회샤즈거우)일대에 꾸려졌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 백두산 밀영이 1994년에 나온 회고록 제5권에 이르러 ‘곰의 골’(黑膳子溝)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국내의 ‘소백수 골’에 위치했다고 바뀌고 만 것이다. 조선혁명의 사령부란 것이 남의 나라 안에 있었다 해서야 쓰겠나 싶어서 그리고 '백두산을 타고 앉아 조선 혁명을 지휘했다'는 김 주석의 사령부가 조선 땅에 있었다 해야 되겠다 싶어서 위치를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북한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백두산 밀영이 소백수 골에 있다고 하기 시작했는가. 1992년 3월에 나온 「조선말대사전」에 보면 백두산 밀영이 1936년 9월에 양강도 삼지연군 소백수 골에 건설되었으며 거기에 김 주석의 사령부 귀틀집과 나란히 김정일의 생가 귀틀집이 있다고 했다. 그 전 해(1991년) 12월에 나온 조선노동당의 정사(正史)인 「조선로동당력사」에서도 백두산 밀영이 소백수 골에 있었다고 했다.

1983년 3월에 나온 「백과전서」까지는 백두산 밀영이 곰의 골에 있었다고 했으니 그 이후부터 1991년까지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사령부 밀영의 위치가 국외에서 국내로 변경된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소백수 골의 밀영의 위치는 김주석 자신이 특정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거기에다 귀틀집을 짓게 하고 거기가 조선혁명의 사령부요 김정일의 생가요 하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점이 언제인가 알아봤더니 김정일이 45세 되던 1987년 2월이었다. 소백수 골에서 백두산 밀영이 1987년 2월에 개영(開營)되었다는 것이 그들 간행물에 나온다. 이 개영(開營)이란 말은 남한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전에도 없다. 그러나 북한 사전에는 있다. “밀영과 같이 <영>자를 붙여서 부르는 기관이나 시설들에서 처음으로 자기 사업 시작하는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오늘날 소백수 골의 백두산 밀영은 북한인민들에게 성지순례의 요지로 되어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추운 겨울에 눈길을 뚫은 위대한 령도자의 고향집 순례는 하나의 의무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다. 1992년 2월 16일엔 김 주석이 아들 김정일의 50돌 시를 써서 발표했는데 거기서도 김정일은 소백수 골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시는 각각 한글과 한문으로 되어있으며 북한에서는 이를 김 주석의 송시(頌詩) 그것이 새겨진 비석을 김 주석의 송시비라 부르고 있는데 높이 3.7m, 너비 12m의 거대한 화강석의 이 비석은 1993년 2월 11일에 소백수 골에 세워졌다 아들이 어디서 났는지를 제일 잘 알 사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온 세계를 향해 새빨간 거짓말을 마구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유일 최고의 사기극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책 142~144쪽)

 

자. 천도교에 대한 왜곡

  회고록의 제15장 4·5절은 바로 그 올가미의 전형이다. 김 주석이 자기 밀영으로 찾아온 박인진을 설복 고무하여 천도교 내에 광복회 조직을 심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일은 없으며 제6사 제7연대의 정치위원 김평이 이창선의 협조를 받아 박인진 등을 포섭했던 것이다. 또 회고록은 박인진 등의 노력으로 천도교인들이 많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했던 양으로도 기술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제6사 조직과장이며 장백현 방면 정치 공작원 책임자인 권창욱(權昌郁, 본명 권영벽:權永壁)이 장백현의 광복회 조직원 중에서 1937년 8월에 41명의 청년들을 골라 제6사에 입대시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책 174~177쪽)

 

차. 처 김정숙 포함 가계 우상화

후계자 후광을 돋보이게 하는 노력으로서의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에 대한 영웅화 작업은 제15장 2절의 ‘국내당 공작위원회’에서와 7절 '량민보증서'에서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완벽한 솜씨의 지하공작원 김정숙.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김정숙이란 이야기는 「조선전사」에서도 없었던 것인데 회고록에서는 아주 재미나는 소설을 이루고 있다. (…) 그 중에서도 괄목할 변화는 조선혁명의 사령부라고 하는 백두산 밀영의 위치를 만주 땅 ’곰의 골'로부터 국내의 ‘소백수 골’로 이동시킨 일이다. 백두산을 타고 앉아 조선혁명을 지휘했다면 사령부가 최소한도 국내에 있어야지 외국에 있었대서야 되겠느냐 해서의 변경일 것이다. 김정일이 45세 되던 1987년 2월부터 거기라고 하여 시설물들을 만들어 놓고 그 중에 김정일이 태어난 초막이란 것도 세웠는데 그때부터 처음 나왔던 소백수 골 이야기가 회고록에서는 아주 그럴듯하게 1936년에 있었던 이야기같이 회상되고 있다. 사령부가 소백수 골로 지정됨으로써 비로소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의 ‘백두산 3대장군’의 신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책 182~185쪽)

 

카. 김구의 임시정부 인장 헌납 시도라는 날조

북한은 일제시대의 국내 인사로는 여운형을, 국외 인사로는 김구를 김 주석 찬양파로 조작 도용하는데 열심이다. 여운형에 대해서는 회고록 제4권 제12장 5절에서 본 바와 같이 조국광복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날조하더니 이 제6권에서는 보천보 사건에 흥분하여 현장에까지 뛰어온 사람으로 날조하고 있다. 또 김구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보천보 사건에 감동하여 임시정부가 김 주석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던 것으로 날조하고 있으나 해방 후에는 1948년 4월에 남북연석회의로 평양에 갔을 때 김구는 김 주석의 인격에 감복하여 조선을 바로 잡을 영웅은 김 주석밖에 없으므로 자기도 김 주석을 따르겠다고 말했다고 날조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김구가 공순의 뜻으로 임시정부의 인장을 김 주석에게 정중히 올렸는데 김 주석은 민중의 신임만 있으면 되었지 인장은 가지고 가라고 사양했다고까지 날조를 감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때 김구는 김 주석에게 일단 서울에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올테니 그땐 여생을 보낼 과수원이나 하나 하게 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는 것이다. (책 222~228쪽)

 

타. 김일, 리을설, 임춘추 등 현대 인물을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소재로 이용 (책 240~241쪽)

 

파. 장기수였다 북으로 송환된 리인모를 선전 도구로 활용

회고록은 혜산사건으로 해서 조직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투쟁은 중단 없이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오늘의 김정일시대는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을 낳는 온상이며 터전이라고 강조하면서 그것이 바로 김정일이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리인모를 내세우며 전개하고 있는 ‘리인모 따라 배우기 운동’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남한 당국이 단순한 계산으로 송환한 리인모가 북한에서 기하급수적인 정치적 의미로 확대 재생산되어 세습집권을 옹호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게 해 준다. (책 265쪽)

 

하.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전방위 역사 날조

보천보 습격 소식을 듣고 여운형은 흥분하여 보천보 현장까지 달려갔으며 김구는 이제부터 임시정부는 김 주석을 후원해야 한다고 하면서 백두산 쪽으로 사람을 보내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김 주석에게로 지지의 시선을 집중시켰다는 뜻으로 창작된 일화이다. 그러나 일화치고는 역사적 무게가 아주 무거운 일화이다. 실화가 아닌 것은 두 사람의 인품을 봐서도 당연하지만 정말 실화라면 그 이야기가 회고록 제6권 이전에도 벌써 광고 선전되었어야 할 터인데 그러한 흔적은 전혀 없다. 물자의 무차별 약탈 사건을 반일투쟁의 결정적 분수령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 세인이 공인하는 항일투사를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제6권이 다루고 있는 몇 개의 전투에 대해서도 본문에서 상론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을 피하겠다. 문제는 김 주석이 주동적으로 계획 지휘한 전투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이 주동한 전투였다는 데 있다. 남이 주동적으로 한 일을 김 주석이 한 일로 바꾸어 놓는다는 이 대담한 수법은 북한의 독자들에게는 먹힐 수 있겠으나 타국의 연구가들에게는 전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역사의 위조일 뿐이다.

끝으로 제6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김 주석에게 충직한 대원들의 모범의 전시이다. 그 속에 부주석을 지낸 김일 임춘추도 포함된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의 덕목을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김 주석의 명령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며 둘째는 김정일에 대한 대를 잇는 충성이다. 이는 오늘날 북한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으로 1974년 이래 최고의 규범으로, 최고의 도덕으로 실천 준수되어 오고 있다. 오늘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지난날의 역사가 그 뒷받침거리로 얼마든지 바꾸어 쓰인다 함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북한에서 진정한 역사가 나오자면 김정일 시대가 끝나고 수령절대주의 시대가 끝나야 할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책 270~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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